1. 갈렐리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피사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
문학자이다. 갈릴레오는 16~17세기 유럽에서 발생했던 과학혁명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천문학과 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여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 믿고 지동설을 주장해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와 대립했다.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 포기 명령을 받았으나, 이후에도 지동설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아 로마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결국 지동설 철회를 다시 한번 강요받고, 로마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가택에서 구류되어 마지막 생애를 보냈다.


2.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업적

1) 진자의 등시성

갈릴레오는 18살 때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갈릴레오는 피사의 로마네스크 천장에서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관찰하다가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다. 흔들리는 샹들레에의 움직임의 폭은 점점 줄어들었으나, 흔들림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좌우로 왕복하는 시간이 동일했음을 확인했다.

당시에는 흔들거리는 물체의 폭이 좁을수록 시간이 적게 걸린다는게 지배적인 생각이였지만, 갈릴레오는 진자가 진동하는 주기는 진폭과는 무관하게 일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를 통해 맥박계를 고안해냈다.

2) 피사의 사탑 낙하실험

갈릴레오의 또 하나 유명한 일화는 피사의 사탑에서 실시했던 공개 낙하실험이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무게가 다른 두개의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리자 두 물체가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고, 이 실험을 통해서 무게가 달라도 낙하에 걸리는 시간은 같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아르키메데스의 이론인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가 그 물체의 밀도와 공기의 밀도 차이에 비례한다는 것이 지배적이였다. 갈릴레오는 이를 발전시켜 진공인 상태를 가정했을때,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는 그 물체의 밀도에 비례할 뿐 무게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는 실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갈릴레오를 신봉한 전기작가 비비아니가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3) 망원경과 지동설

갈릴레오는 당시 네덜란드 안경제작공이 특허 신청한 망원경 정보를 입수하여 이를 개량하여 자체적으로 망원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30배율 망원경을 만들어냈다. 그는 본인이 만든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10년 갈릴레오는 그의 망원경을 이용하여 목성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정된 세 개의 별에 대해 관찰을 시작했다. 고정되어있다고 생각한 별들에 대해 관측을 이어나가던 그는 곧 그 세개의 별이 목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개별 행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또 다른 행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당시 지배적이였던 아리스토텔리스-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동설과 완전히 배치되는 관찰결과였다.

이어 갈릴레오는 달과 비슷한 크기의 변화를 보여주는 금성에 대해 관찰을 시작하게 된다. 기존에 지동설은 초승달 모양의 위상만 관측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초 지동설을 창시했던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지구-금성의 각각의 위치 변화에 따라 모든 위상을 관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갈릴레오는 관측을 통해 지구에서 보이는 금성의 모양은 초승달, 반달, 보름달 등 모든 위상이 관측가능해내어, 금성이 태양주변을 돌고 있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천문학적으로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후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많은 행성들을 관측하면서, 무한우주라는 관념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태양의 흑점을 최초로 발견하고 불규칙한 운동을 하고 있음을 관측하여, 천상계가 완전하고 불변하다는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는데 기여했다.


3.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종교재판

갈릴레오의 이러한 관측을 토대로 한 지동설의 주장은 당시의 카톨릭으로서는 상당히 불편한 내용이였다. 당시 기독교 교리는 지구가 중심에 있으면서 최외곽에는 신이 사는 하늘이 있다는 우주 구조를 기초로하였는데, 지동설은 이러한 교리를 뿌리째 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카톨릭 교회는 1616년 금지령을 내리면서,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은 카톨릭 교리는 물론 참된 철학에도 위배되므로 카톨릭 교도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고 선언했다. 그리고 갈릴레오로부터 앞으로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가르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낸다.

이후 1628년 갈릴레오의 친구였던 우르바누스 8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갈릴레오 측근들은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비교해서 공정하게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책을 쓸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낸다. 

그리하여 갈릴레오는 1630년 <두 가지 주된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하게 된다.

세 세사람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장을 대표하는 심플리치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대표하는 살비아티, 그리고 중립적인 사그래도가 등장한다.

책에서는 살비아티의 간결하고도 명확한 주장에 대해 심플리치오는 억지주장으로 일관하며, 사그레도가 가세하여 심플리치오를 조롱하기도 한다. 결국 심플리치오가 설득당하면서 책은 마무리 된다.

이 책이 당시 출간되고나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되자 카톨릭 교단은 황급히 수습을 시작하게 되고, 책 속의 심플리치오의 모델이 교황이라는 소문을 접하고는 갈릴레오를 1632년 로마교황청에 소환하게된다. 

이후 1633년 심문을 통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어 마지막 생애를 자택에서 보내게 된다.